흑조

2010. 2. 18. 00:21 from 일신상의 이유
생각해보면 하도 업데되는 내용이 없어 '연간딴지' 소리를 듣던 때도 잊지 않고 한 번씩 들르던 독자였다. 
근데 그렇다고 또 막 열렬한 팬은 될 수가 없었던 것이,
꽃 피고 나비 나는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험험) 아무래도 위악적인 언어가 좀 취향에 안 맞았더랬다.

그러다 최근 사이트가 부활을 하고 대대적인 개편을 거치고 하는 사이
좀 더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
이전에 비해 올라오는 내용들이 나에게 좀 더 relevant한 탓도 있고
내가 그 사이 몇 살 더 먹으면서 그 고유한 subculture를 그대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얻은 걸 수도 있고.
하여간 특히 필독의 축구문화사는 아주 구우우욷.♡

뭐 이 얘기를 길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오늘 올라온 짧은 기사 하나를 읽고 한 두 마디 적고 싶은 게 있어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딴에는 열심히 좇는다고는 하는데
PD수첩 재판이 쟁점이 뭐였고 결과가 어떻게 나왔고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쟁점의 중심에 있었을 번역가는 이름도 생소하다.
해서 이 기사가 뭘 꼬는 건가 좀 더 찾아 읽어보기로.

우선 최근에 이번 송사 관련하여 낸 책에다
현대영어, 중세영어, 고대영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떼고 나니
영어의 새로운 경지가 보이더라는 골자의 내용을 썼다는데
이런 허총재삘나는 문장은 일단 패스.
내가 직접 읽은 게 아니니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이PD가 비웃는 뉘앙스로 전달했을 수 있으니까.
아울러 막말로 정말 새로운 경지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아래의 글을 읽었다.
다 인용할 수는 없으니 내가 특히 식겁했던 부분만 담기로. (정지민 본인의 全文은 여기에.)

나는 천상 인문학도다. 진중권 같은 연예인을 지망하는 사이비 석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허술하게 인용해서, 교양에 목마른 무지한 어린아이들을 낚을 때, 나는 -비록 PDF파일일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 원문을 혼자 공부했다. 그가 TV에 나와 시시덕거릴 때 나는 TV를 아예 없애고 몇 년을 살아왔다. 남들이 커피나 먹고 수다 떨 때 나는 독서를 했다. 이것이 내가, 그가 보기에 "잘났다고 생각"할만한 이유다. 소신이 있고 의지가 강하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 시점은 물론이고, 그 어느 사건이 터지더라도 공부를 병행한다. 진중권처럼 무슨 언론에서 주목해줘서 "잘나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설령 미국 대통령이 주목해도, 그가 내가 존경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PD수첩 사건에서 활용한 언어능력, 자료찾기, 합리적인 유추와 논리제시는 모두 내가 공부하면서 사용하는 것의 몇 천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연예인 석사에게 모욕당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은 물론이고 논리가 결여된 주장, 또 무슨 대단한 이념으로 포장한 밥그릇 싸움을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 사회를 떠나기 전에, 얼마나 수준이 심각한 이들이 바보상자를 꿰차고 있는지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진중권 같이 자신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알려보려고 안달이 난 이들은 제발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막말로, 아둔한 이들을 속여 많이 "해먹었"지 않는가? PD수첩이 무죄판결 방송에서까지 국민을 모두 초등학생 수준으로 알고 사기를 친 행태, 그리고 판사가 그런 오역을 증거랍시고 채택한 현실이 드러난 지금, 그나마 입 닫고 있는 게 그의 무식을 덜 드러낼 수 있는 처신방법이며, 인격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이다.

당연히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맞다고 믿는 번역을 했겠지.
자기만큼 해당언어에 유창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몰아붙이니 발끈한 마음도 들테고.
나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번역일이라는 게 잘해야 본전이고 하는 사람 속만 곯는 그런 작업이라는 거는 배웠다.

그치만 스스로를 "천상 인문학도"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게 경이로웠다.
나야 겸손을 가장한 재수없음-_-이란 소리까지 들어봤으니
뭐 나처럼 패를 언제든 접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도 학자의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겠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강한 신뢰를 가진 사람을 맞닥뜨리면... 난 좀 무섭다;;  
swan이 사실 검은 것도 있다는 거, 17세기말에 발견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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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옥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