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2010. 4. 22. 04:08 from 일신상의 이유
십대 때는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했더랬다.
바람 윙윙 불어 을씨년스럽고 하늘은 소라색이고.
일제 잔재라는 그 'そら(空)' 말고 정말 말그대로 소라껍떼기색.
그런 날씨에 다락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창작활동이 된다고 믿는, 문학소녀-_-였던 것이다.

근데 이제 나이를 이만큼 먹고 나니 역시 좋은 날씨가 좋다(박한;;)는 결론.
요 며칠 믿을 수 없을 만치 화창한데다 워낙 꽃나무며 풀밭이 많은 동네에 살다 보니
창밖을 내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업되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
아울러 매사에 의욕적이고. 나의 골골한 컨셉에 안 어울리게.

하려던 얘기가 이건 아니고.
논문을 쓰는 동안 딴짓을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경영학부생들 틈에서 일어수업을 3년동안 들은 것이다.
3년이래봤자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번 듣는 게 다고
마지막 해에 가선 아무래도 내 본업이 빡세지기 시작해서 못 간 날도 부지기수고.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100% 내 선택으로 청강하는 거면서
과제도 다 내고 시험도 쪽지시험까지 다 보면서 완주했다는 데 일단 의의를.
 
첨엔 참 펄펄 날았었는데 말이지. 물론 나만이 아니라 한국 학생들 대부분이.
일단 문법이 비슷하니 서양애들은 죽어도 감을 못 잡겠다고 징징거리는 조사도 척척이고
(그 때마다 관사랑 전치사 때문에 겪는 마음고생을 한큐에 날릴 만큼 통쾌했다는. 음화화홧.)
거기에 내 경우 덤으로 주변 어르신들 언어 습관이라든가 옛날 코미디 프로라든가 그런 걸 통해 자주 접한 탓인지
영어 고유명사를 카타카나로 바꾸는, 가령 맥도널드를 마꾸도나루도(マクドナルド)로 쓰는 그런 걸 쉽게 해서;;
가뜩이나 큰이모 보듯 하는 꼬꼬마 한국 후배들로부터 일제 강점기를 겪은 사람같은 대접을 받기도. 킁.

그러나 쉽게 배우면 잊는 것도 빠른 것인지
지금은 기억 나는 게 거의 없어 어디 가서 배웠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
회사 다닐 때 일본 장기 출장 준비하라고 해서 내 돈 내고 6개월 저녁반 끊었다가
맨날 야근하느라 히라나가도 못 떼었던 그 때로 고스란히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도쿄에서 학회가 있어서
앞으로 두 달 간 매일 잠깐씩이나마 복습을 하면 혹시 음식 주문 같은 걸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인터넷상에서 오디오 파일을 몇 개 틀어 봤는데 세상에, 이것저것 들리는 것이 아닌가.
물론 영어로 치면 중1교과서 수준의 기초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김건모가 국민가수던 시절, 그 어머니가 무슨 토크쇼에 나와서
콩나물에 물을 주면 죄다 시루 아래로 빠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알게 모르게 남아 싹이 나고 자란다며
부모-자식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해서 우리 김여사님이 매우 공감하셨더랬는데.
포인트는 다르지만 같은 비유를 빌리자면 
지난 3년 다 흘러가 버린 듯 하지만 어쩌니저쩌니 해도 머리에 남은 게 있었다니,
이래저래 깜빡깜빡하는 만학도 입장에서 매우 고무적인 발견.

'일신상의 이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Back to the '50s  (0) 2010.06.02
시나리오  (0) 2010.04.23
밤새지 마라 말이야  (0) 2010.04.09
삼성왕국  (3) 2010.03.31
말의 무게  (0) 2010.03.31
Posted by 옥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