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평소보다도 길다보니 덩달아 블로그빨을 마구 쎄우게 되는 듯.)

집 근처에 괴물같이 큰 마트가 있다.
근처라고 그래봐야 걸어갔다 오는 것은 좀 무리라 버스를 타야 되지만
그래도 이사오고 처음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신나했는지 모른다.
내가 대형마트 가서 구경하는 거 좋아하는 건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한국에 있을 땐 전혀 없던 취미이다.  
오히려 재래시장 죽인다고 걱정하고
단가 떨어뜨린다고 제3세계 생산지에서 얼마나 노동력 착취를 해대는지 알아버린 바람에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고.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네 공판장을 애용했더랬다.  
그런데 멀리 나오고부터 새 버릇이 생긴 거다.
물론 빵은 빵집에서, 고기는 정육점에서 사는 게 훨씬 질도 좋고 값도 싸지만
일단 살고 있는 곳에 그런 가게들이 없기도 하고
제목에도 적었다시피 이건은 일종의 테라피 개념.
지난 몇 주 동안 간다간다 별렀는데 번번이 일이 있어
가까운 편의점에서 그 때 그 때 아쉬운 걸 사다 때우다가
어제 간만에 장바구니 매고 다녀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긍정적 기분.



아래는 그르노블에서 윗집 살던 민이가 올린 '산신령 구름' 사진 아래 덧붙였던, 좀 된 글. 



2005.11.16 08:11
난 신경이 '굵어서' 우울함 따위는 모를 것처럼 보인다지만
그럴리가;; (아, 두통 생전 앓아 본 적 없다는 건 맞다. -0-)
울적할 때면 나름의 비방들이 있겠지.
내 경우는 대형마트. 한국에선 전~혀 없던 습관.

뭘 살 것도 아니면서 대형마트에 가 서 있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평온해지기 시작한 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Leicester 시절,
가족이란 자고로 한지붕 아래서
너나가 따로 없이 비빔밥처럼 섞여서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방침 아래 자란 사람이
그런 가족을 떠나 처음 외국땅을 밟았을 때,
처음 며칠은 정말 목이 메서 물도 안 넘어가고 ㅠ
빈 기숙사 방에 돌아와 불을 켤 때마다 울컥-하던 그 때,
기숙사 사이트 바로 뒤에 위치해 있던 어마어마한 Safeway는
말그대로 내 안.식.처.였다.

조건반사란 무섭기도 하지.
그 이후도 줄곧 유럽 시골과의 연은 계속되어
도시를 옮기고 심지어 나라를 옮겨다녀도
그 때마다 버스 종점에는 대형마트가 있고
삶이 나를 속일 때면 쪼르륵 달려가게 된다.
(Egham의 Tesco는 부족해!!!)

아 난 정말 사설이 길어.-_-

Grenoble 시절 역시
논문 진도가 안 나갈 때마다 전차를 휙 잡아타고
시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인 Carrefour로 가곤 했더랬다.
학교 갈 때도 맨날 저 앞을 지나가고.
산이야 도시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보이는 거였지만
매일 보던 그 때도 저 산신령 구름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일년만에 보니 심지어 뭉클.

사람은 아무때고 손 뻗으면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알 때부터
철이 났다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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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옥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