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개

2010. 3. 29. 22:13 from 일신상의 이유
원체 답답한 구석이 많은 성격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파악하고 있는지라
웬만한 건 '나같은 사람은 뭐 이러다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서 도태하겠지' 그러고 마는데
그래도 개인적으로 이건 좀 다르게 타고 났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multitasking이 전~혀 안 된다는 것.
음악을 들으면서는 뭘 읽을 수가 없어, 이런 차원이 아니라
걸으면서는 음료수를 마실 수 없다거나
말을 하고 있는 중에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탈 수 없다거나;;;
심지어 고등학교때는 짝궁이 10분 있다가 깨워달라고 하면
그 10분 동안 시계 보느라고 아무것도 못했다는 그런 슬픈 일화마저. T^T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multitasking에 강하다고들 하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마치 반평균 깎아먹는 학생처럼 괜히 미안한 지경. 

지금 보일러 고치는 아저씨 기다리는 중인데
아니나 다를까 정서불안 어린이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싸리 그냥 좀 놀기로. ^^

지난 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학회에 가서 발표를 했다.
한 때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conference junkie라고 자기소개를 할 정도로 참 징하게 다녔더랬다.
지도교수님이 고만 뽈뽈거리고 다니고 제발 논문 좀 쓰라고 핀잔도 많이 줬었는데.
근데 그게 정말 내 좋아서 그렇게 다닌 거다. 누가 시킨 거였으면 그렇게 돈 쓰고 시간 쓰고 체력 써가며 못 그러지, 암.
어려서는 누가 뭘 가르쳐주면 집에 가서 혼자 책 찾아 보고 확인을 해야 비로소 내 것으로 소화가 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피곤한 스타일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누군가가 읽고 말로 설명해주는 걸 듣는 쪽이 편하다.
만학도가 되고 나서 딸리는 체력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일종의 진화를 한 것인지 어쩐지.
게다가 학회를 가면 생각도 못한 주제-가령 빅토리안 시대의 책상과 당시 여성의 삶이라든가,
오투만제국의 羊 거래 기록이라든가-에 올인한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나는 그런 데서 이상하리만치 큰 평온을 얻는다.
사람마다 열정을 갖는 분야가 죄다 다르니 세상이 이만큼 굴러가는 거겠지, 이러면서.

이번에 간 곳은 규모도 작고 철학적 이론에 대한 얘기가 평소보다 많이 나와서 그 자체로 색다른 경험.
아울러 슬라이드를 발표 12시간전 숙소에서 만드는 등 (갑자기 둘째날로 패널이 옮겨지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누)
준비가 허접했던 것에 비해 발표 자체가 잘 끝나서
'어머, 혹시 내가 신바람 이박사-_- 되더니 실력이 뿅!하고 늘었나?' 이런 착각을 잠시 할 정도.
그러나 그런 걸로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는 건 당연히 아닐테고
내가 볼 때 워낙 말쟁이들 틈에서 몇 년을 버텼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 좀 물이 든 모양.
전공이 경영, 신문방송, 커뮤니케이션, 정치 이렇게 이어지다 보니
나의 학창시절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말이 청산유수인 사람들 틈에서의 고군분투. 흙.
이건 영어, 불어 이런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말그대로 말.
똑같이 한국어가 모국어라도
신동엽이나 안재욱처럼 (왜 이 둘이 딱 떠올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음;;) 말을 매끄럽게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경우가 있듯.
흉보다 닮는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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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옥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