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라인 [2]

2018. 8. 12. 22:05 from 일신상의 이유

미디어를 통해 접한 내용만 가지고 누군가를 흠모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라는 아이러니. 그래서 지난 몇 주는 노회찬 의원과 황현산 교수의 연이은 부고로 마음이 지독하게 안 좋았더랬다. 

황 교수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팬이 되어 트위터 팔로우를 하다가 

더러는 더 좋아졌다고 하고 더러는 실망했다고 하는 패턴인 거 같던데 

내 경우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순전히 트위터에 짤막짤막 올리시는 글들에 반해 팔로우를 한 게 다인 케이스. 


소셜 미디어가 유명인의 부고를 접하면 

그 사람의 생전 작품 중 개인적으로 소중한 기억이 있거나 각별히 감동적이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공유하며 추모한다는 일종의 형식이 생긴 느낌인데 

아래는 그렇게 읽게 된 글들 중 꼭 간직하고 싶은 것들. 

특히 소금과 죽음이란 칼럼은 추모의 마음과 별개로 현타가 제대로 와서 계속 곱씹고 있는 중. 


[삶의 창] 소금과 죽음 (황현산, 한겨레, 2009.08.14)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서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내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특목초'를 졸업한 나는 염부가 되기는커녕,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짠물에 발을 적시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집안 어른들의 소망대로 책상 앞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의 춤> 같은 시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황현산 칼럼]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황현산, 한겨레, 2016.09.08)



노회찬은 이런 정치인이었습니다 (천관율, 시사IN,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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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옥보살 :